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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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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491년부터 518년까지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디라키움에서 태어나 재정 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황제가 되었으며, 이색증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검소한 통치를 통해 국고를 증진시켰고, 이사우리아 전쟁, 사산조 페르시아 전쟁, 불가리아족 침략 등 대외적인 위협에 대응했다. 또한, 화폐 개혁과 행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종교 문제와 관련된 갈등으로 인해 불안정한 통치를 겪었다. 그는 단성론을 지지했으나 칼케돈파와의 갈등으로 여러 차례 폭동이 발생했으며, 고트족 출신 장군의 반란을 겪기도 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황위는 유스티누스 1세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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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우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금 동전
아나스타시우스 1세, 517년 집정관 부제
로마자 표기법Flavia Anastasius Augustus
그리스어 표기Αὐτοκράτωρ καῖσαρ Φλάβιος Ἀναστάσιος αὐγουστος
즉위491년 4월 11일
퇴위518년 7월 9일
이전 통치자제논
다음 통치자유스티누스 1세
출생일기원후 431년경
출생지디르하키움 (현재의 알바니아 두러스)
사망일518년 7월 9일 (향년 87세)
사망지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매장지성 사도 교회
배우자아리아드네
왕조레온 왕조
종교비칼케돈파 기독교
통치
정식 명칭황제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아나스타시우스 아우구스투스
즉위일491년 4월 11일
퇴위일518년 7월 9일
가족
아버지폼페이우스
어머니아리아나(아나스타시아 콘스탄티나)
자녀남자 (이름 미상, 서자, 507년 살해됨)

2. 생애

430년경 디라키움에서 태어난 아나스타시우스는 전임 황제 제논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황후 아드리아네에 의해 황제로 선택되어 결혼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60대 초반으로, 공정하고 성실한 인품으로 덕망이 높았으며, 한쪽 눈은 파란색, 다른 한쪽은 검은색인 오드아이를 가졌다.

아나스타시우스는 검소하고 소박한 정치를 펴며 공공지출을 억제했고, 맹수와 싸우는 경기나 야간 축제를 금지했다.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의 국고는 크게 증가했다.

즉위 초, 제논의 동생 롱기누스가 이사우리아인을 규합해 일으킨 폭동은 492년 롱기누스가 체포되어 알렉산드리아로 유배되면서 내전으로 번졌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사우리아인을 추방하고 아나톨리아에서 벌어진 게릴라전을 진압하여 496년에 안정을 되찾았다. 502년부터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동부 요새를 잃기도 했으며, 불가르족의 트라키아 침략에 대비해 마르마라해에서 흑해까지 56km 길이의 방어벽을 세웠다.

종교적으로 아나스타시우스는 단성론에 기울었으나, 즉위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유페미우스의 요구로 단성론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단성론자로 의심받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녹색당과 청색당으로 나뉘었을 때 단성론을 옹호하는 녹색당을 지원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나이가 들면서 아나스타시우스는 더욱 단성론에 기울어 총대주교 유페미우스를 유배보냈다. 511년 단성론자들이 예배 기도 트리사기온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신"이라는 어구를 추가하자, 칼케돈 공의회를 따르는 시민들이 봉기했다. 황제는 총대주교의 도움으로 진정시켰으나, 이듬해 같은 어구가 다시 등장하자 큰 폭동이 발생하여 황제의 조각상이 파괴되고 화재가 발생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경기장에 시민들을 모아 놓고 황제복을 벗으며 사정하여 성난 시민들을 돌려보냈다.

말년에 고트족 혈통의 비탈리아누스가 세 번 봉기했으나 실패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조카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조카들이 지정된 자리에 앉지 않자 상심하여 다음날 가장 먼저 알현한 황실 경호대장 유스티누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51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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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시우스는 파울루스라는 형이 있었고,[8] 502년 집정관이었던 플라비우스 프로부스는 그의 조카였다.[11] 여동생 카이사리아는 세쿤디누스와 결혼하여 히파티우스와 폼페이우스를 낳았다.[11]

2. 1. 초기 생애와 즉위

430년경 디라키움에서 태어났다. 일리리아-로마 가문 출신이었다.[5][6] 한쪽 눈은 검고 다른 한쪽 눈은 파란색인 오드아이(이색증)를 가지고 있어 “디코루스”(Δίκορος|Díkorosgrc, "두 눈동자의")라는 별명을 얻었다.[7] 황제가 되기 전 제국의 재정 부서에서 매우 성공적인 관리였다.[14]

491년 제논 황제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제국에 정통 황제를 주십시오!"라는 군중의 외침이 있었다.[14] 제논의 황후 아리아드네는 아나스타시우스를 황제로 선택하고 그와 결혼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즉위 당시 60세가 넘었지만, 공정하고 성실한 성품으로 백성들에게 존경받았다. 아리아드네가 아나스타시우스를 제논의 형제 롱기누스[2]보다 선택한 것은 이사우리아인들을 화나게 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단성론에 동정적이었다.[2] 그의 통치 조건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그가 칼케돈 공의회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서약할 것을 요구했다.[15] 아리아드네는 4월 11일 즉위 직후인 5월 20일 아나스타시우스와 결혼했다.[16][17][18][19]

2. 2. 통치와 업적

제논 황제가 491년에 사망한 후, 많은 로마 시민들은 정통 기독교인이자 진정한 로마인 황제를 원했다.[14] 이러한 민심에 따라 제논의 미망인 아리아드네는 아나스타시우스를 황제로 선택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즉위 당시 60대였다. 아리아드네는 제논의 동생 롱기누스[2] 대신 아나스타시우스를 선택했는데, 이는 롱기누스가 황제가 되기에 더 적합한 인물이었기에 이사우리아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또한 청색과 녹색 서커스 파벌의 지지도 받지 못했는데, 이들은 롱기누스의 후원을 받았다. 아나스타시우스 즉위 후, 이들은 반복적으로 폭동을 일으켜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2] 종교적으로 아나스타시우스는 미아피지즘에 동조적이었다.[2]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즉위 조건으로 그가 칼케돈 공의회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했다.[15]

아리아드네는 491년 4월 11일 즉위 직후인 5월 20일에 아나스타시우스와 결혼했다.[16][17][18][19] 아나스타시우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부담하던 세금을 폐지하는 등 현명한 세금 감면 정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는 제국 행정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20] 그의 개혁으로 제국의 세수가 개선되고 재정적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그의 통치 말기, 국고에는 약 145149.44kg의 금 준비금이 있었다고 한다.[21]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금화 ''솔리두스''


아나스타시우스의 치세에 제국은 롱기누스가 일으킨 이사우리아 전쟁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아나스타시우스 전쟁을 치렀다.[22]

이사우리아 전쟁(492년–497년)은 제논 황제의 동생이자 아나스타시우스에게 황위를 빼앗긴 롱기누스를 지지하는 이사우리아인들이 일으켰다. 492년 코티아이움 전투에서 반란군은 패배했지만, 게릴라전은 이사우리아 산맥에서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20] 이들이 산악 지대에서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파피리우스 성을 점거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5년간 지속되었지만, 아나스타시우스는 490년대 중반 경제 관련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는 전쟁이 정부의 모든 자원을 소모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1] 5년 후 이사우리아인들의 저항은 분쇄되었고, 이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많은 이사우리아인들이 트라키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502년-505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테오도시오폴리스와 아미다를 점령했지만, 로마는 나중에 금을 지불하고 아미다를 되찾았다. 페르시아 영토 또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506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아나스타시우스는 니시비스에서 페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다라스라는 강력한 요새(아나스타시오폴리스)를 건설했다.[22] 그러나 발칸 지역의 병력은 부족했고, 슬라브족불가리아인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을 보호하기 위해 아나스타시우스는 프로폰티스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건설했다. 그는 자신의 출생지인 디라키움을 아드리아 해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 중 하나로 만들기 위해 두르러스 성을 건설했다.[20]

아나스타시우스는 확고한 미아피지즘 신봉자였지만, 그의 교회 정책은 온건했다. 그는 제논의 헤노티콘 원칙과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20] 그러나 512년, 페르시아에 대한 군사적 성공 이후 자신감이 생겼는지, 아나스타시우스는 칼케돈대주교를 축출하고 미아피지즘 신봉자로 대체했다.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합의를 위반했고 칼케돈에서 폭동을 야기했다.[2] 이듬해, 장군 비탈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황군을 빠르게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2] 군대가 접근하자 아나스타시우스는 비탈리아누스에게 트라키아 군 사령관 칭호를 수여하고 아카키우스 분열 종식을 위해 교황과 소통하기 시작했다.[2] 2년 후, 장군 마리누스가 비탈리아누스를 공격하여 그와 그의 군대를 트라키아 북부로 몰아넣었다. 분쟁이 끝난 후, 아나스타시우스는 518년 사망할 때까지 제국을 통치했다.[23]

508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에게 로마 제국 명예 집정관 직위를 수여했다.

2. 3. 종교 정책과 갈등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미아피지즘을 믿었지만, 교회 정책은 온건했다. 그는 제논의 헤노티콘을 따르고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20] 그러나 512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신감이 생겨 칼케돈대주교단성론 신봉자로 교체했다.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합의를 어긴 것이었고, 칼케돈에서 폭동을 일으켰다.[2] 이듬해, 장군 비탈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군대를 빠르게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2] 군대가 접근하자 아나스타시우스는 비탈리아누스에게 트라키아 군 사령관 칭호를 주고 아카키우스 분열을 끝내기 위해 교황과 대화하기 시작했다.[2] 2년 후, 장군 마리누스가 비탈리아누스를 공격해 그와 그의 군대를 트라키아 북부로 몰아냈다. 이 분쟁이 끝난 후, 아나스타시우스는 518년 죽을 때까지 제국을 완전히 통제했다.[23]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단성론을 지지하여 가톨릭 교회와 갈등을 겪는 등 종교 정책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역시 단성론을 지지하여 로마 교황 펠릭스 3세에게 파문당했고, 이로 인해 동서 교회는 분열되었다.

2. 4. 사망과 후계

발레시아누스 익명서는 아나스타시우스가 자신의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세 명의 조카 중 누가 황위를 계승할지 몰라 세 개의 좌석 중 하나 아래에 메시지를 놓고 조카들에게 방에 앉도록 했다. 그는 메시지가 있는 좌석에 앉은 조카가 자신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두 조카는 같은 좌석에 앉았고, 메시지가 숨겨진 좌석은 비어 있었다. 기도를 통해 그 문제를 신에게 맡긴 후, 그는 다음 날 아침 자신의 방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이 다음 황제가 될 것이라고 결정했고, 그 사람은 그의 근위대장인 유스티누스였다.[24]

아나스타시우스는 518년 7월 9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자녀 없이 사망했다.[25][26][27] 후대의 요한 말라라스 연대기(c. 491–578)와 《파스칼 연대기》(c. 630)에 따르면 그는 90세 반이었다.[28][29] 6세기 초 역사가 빅토르 투누나는 그가 88세에 죽었다고 말하는데,[30] 이 수치는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이 받아들이고 있다.[31]

그는 사후 신성시되는 자(divus)로 봉헌된 것으로 알려진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의 황실 재무부를 남겼는데,[24] 이는 32만 파운드의 금 또는 약 426739.74kg에 해당한다. 문맹의 농민 출신 유스티누스는 그 후 황제가 되었다. 한편, 그의 조카이자 미래의 후계자인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생활에 몰두했다.

3. 행정 개혁과 화폐 제도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행정 효율성을 높이고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례적인 관심을 보였다.[23] 그는 정부 거래에서 물품 대신 현금 지불 방식을 도입하여 횡령 가능성을 줄이고 물품 운송 및 보관의 필요성을 없앴다. 또한 회계를 용이하게 했다.[2] 그는 세금에도 이 방식을 적용하여 세금을 물품이 아닌 현금으로 납부하도록 했다.[2] 그는 군인들에게 무기와 군복을 제공하는 대신 각 군인이 자신의 무기와 군복을 구입할 수 있도록 충분한 돈을 지급했다.[2] 이러한 정책 변화는 효과가 있어서 납세자들은 이전보다 세금을 적게 냈지만 정부 수입은 증가했다.[2] 수입 증가는 황제가 군인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할 수 있게 했고, 이는 이전 황제들이 의존해야 했던 야만인과 이사우리아 용병이 아닌 로마 출신 군인들을 군대에 유인했다.[32] 아나스타시우스는 제국의 재정을 "신중하게 관리"한 것으로 종종 언급된다.[33]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시우스는 관직 판매 관행을 계속했다.[1] 그는 너무 많은 관직을 판매하여 민간 귀족의 창출을 용이하게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주장은 아피온 가문과 같이 정부 고위직을 자주 차지했던 가문의 영향력 증가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1]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인 켈러 장군 켈러, 그의 처남, 그의 형제, 그의 조카, 그리고 그의 손조카에게 관직을 부여했다.[1]

5세기 중반 부분적으로 붕괴된 초기 비잔티움 제국의 복잡한 통화 시스템은 498년 아나스타시우스에 의해 부활되었다. 새로운 시스템에는 세 종류의 금화, '''솔리두스'''와 그 절반('''세미시스'''), 그리고 3분의 1('''트레미시스''')이 포함되었고; 다섯 가지 종류의 구리 동전, '''폴리스'''(40 누무스에 해당)과 그 일부분인 누무스까지 포함되었다.



새로운 화폐는 다른 지역과의 무역에서 빠르게 중요한 부분이 된 것 같다. 옥수스 강 북쪽의 카르주 사막에서 폴리스 동전이 발견되었다.[34] 그의 재위 시대의 솔리두스 4개가 로마 제국에서 매우 먼 중국에서 발견되었다. 중국은 있을 법하지 않은 무역 파트너로 보일 수 있지만, 로마인과 중국인은 아마도 실크로드를 따라 여행하는 중앙아시아 상인을 통해 사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부 로마 무역 파트너는 아나스타시우스의 동전을 복제하려고 시도했다. 아나스타시우스가 만든 화폐는 그의 재위 후에도 오랫동안 사용되고 널리 유통되었다.[34]

1996년 발행된 북마케도니아의 50 데나르 지폐의 앞면에는 아나스타시우스의 40누무스 동전이 그려져 있다.[35]

4. 친족

아나스타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손으로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후예 중 한 명이었다.[9] 그의 아버지 이름은 폼페이우스(410년경 - ?)이고, 어머니는 아리아나였다. 아나스타시우스에게는 파울루스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496년에 집정관을 지냈다.[8] 여동생 카이사리아(435년경 - ?)는 세쿤디누스와 결혼했으며, 그녀의 혈통은 7세기 초까지 이어졌다.[9][11]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직계 자손으로는 507년에 살해된 이름 미상의 아들만 있었고, 그 외에 생존한 직계 자손은 없었다. 그의 방계 후손들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헤라클레이오스 왕조와 연결되었으며, 불가리아 제국서고트 왕국, 아스투리아스 왕국, 스페인 왕실까지 이어졌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아버지폼페이우스410년경 - ?
어머니아리아나
형제파울루스496년 집정관 역임[8]
여동생카이사리아435년경 - ?, 세쿤디누스와 결혼[11]
아들이름 미상507년 사망, 생존한 직계 자손 없음


참조

[1] 논문 Anastasius I 2009-01-01
[2] 서적 A Concise History of Byzantium https://archive.org/[...] Palgrave
[3]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14. Late antiquity: empire and successors, A.D. 425–60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ume II: From Augustine to the Eve of the Reformation https://books.google[...] Abingdon Press 2010-01-01
[5] 논문 The fragments of late antique patria https://core.ac.uk/d[...] University of Gottingen 1988-01-01
[6] 서적 Count Marcellinus and his chronicl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0-10-12
[7] 웹사이트 Anastasius (AD 491–518) http://www.roman-emp[...] 2006-08-24
[8] 웹사이트 The Consular List http://www.roman-emp[...] 2008-03-02
[9] 간행물 Prosopography of the Later Roman Empire
[10] 서적 Continuité des élites à Byzance durant les siècles obscurs. Les princes caucasiens et l'Empire du VIe au IXe siècle de Boccard 2014-07-26
[11] 간행물 Prosopography of the Later Roman Empire
[12] 웹사이트 James Allan Evans, "Justin I (518–527 A.D.)" http://www.roman-emp[...] 2008-06-22
[13] 서적 Age of Spirituality: Late Antique and Early Christian Art, Third to Sev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4] 서적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Rutgers University Press
[15] 논문 The Religious Policy of Anastasius I 1940-01-01
[16] 기타
[17] 기타
[18] 기타
[19] 기타
[20] 백과사전 Anastasius I
[21] 서적 The War of the Three Gods: Romans, Persians and the Rise of Islam https://books.google[...] Pen and Sword
[22] 서적 Syriac Chronicle
[23] 서적 A Concise History of Byzantium https://archive.org/[...] Palgrave
[24] 기타
[25] 기타
[26] 기타
[27] 기타
[28] 기타
[29] 기타
[30] 기타
[31] 간행물 PLRE II
[32] 서적 A Concise History of Byzantium https://archive.org/[...] Palgrave
[33] 서적 The Economic History of Byzantium Dumbarton Oaks Research Library and Collections
[34] 논문 New Evidence for Byzantine Activity in the Caucasus During the Reign of the Emperor Anastasius I 2006-01-01
[35] 웹사이트 National Bank of the Republic of Macedonia http://www.nbrm.gov.[...] 2009-03-30
[36] 서적 西洋古典学事典 京都大学学術出版会 20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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